(노인복지) 백 세 인생, 축복인가 재앙인가?
나이 예순 아홉. 어쩌다 보니 이만큼 살아왔다. 예전 같으면 ‘노인’ 소리 들을 나이지만, 요즘은 ‘청춘’이란다. “요즘 칠십은 환갑이지요.”라는 말이 위로인지 조롱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노인은 이곳저곳이 아파야 정상이다.”
사실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병원 안 가는 날이 손에 꼽히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이젠 치과에 가면 자연스럽게 묻는다. “이건 뽑고, 임플란트인가요?” 당연하다는 듯이 크라운을 씌우고, 이 하나쯤은 임플란트로 대신한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 생태계의 순리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알 수 있다. 환자 대부분이 노인이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그들의 얼굴엔 익숙한 체념이 스며 있다. 자식 걱정, 병 걱정, 돈 걱정. 웃을 일이 없다는 표정들.
의학이 발전했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위암도 초기에 잡고, 관절도 갈아 끼운다. 심장에 스텐트를 넣고, 백내장을 제거한다. 덕분에 ‘90세’는 이제 더 이상 희귀한 나이가 아니다. 우리 동네만 해도 구순 잔치를 준비 중인 집이 몇 곳 있다. 그런데 나는 문득 묻고 싶다. 그 긴 세월, 과연 삶의 질은 어떠한가?
구순을 넘긴 어떤 어르신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 발로 걷고, 내 손으로 밥 떠먹을 수 있으면 그게 복이지.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 지탱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그렇다. 인간의 삶은 움직일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밥을 먹고,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과연 삶일까? 과연 ‘연명’과 ‘삶’은 같은 뜻일까?
나는 요양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친구의 모친이 계셔서 함께 찾아뵈었다. 깔끔한 시설, 정돈된 침대, 친절한 간호사들. 표면만 보면 별문제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눈동자는 달랐다. 어딘가 공허하고, 불안했다. 누군가는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봤고, 누군가는 한자리에 앉아 종일 입을 다물었다.
요양원 한편에는 면회 일지를 적는 칠판이 있었다. 방문객의 이름과 날짜를 적는 표였다. 어떤 어르신의 이름 옆에는 한참 동안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친구가 말했다.
“저분은 자녀가 미국에 있대. 작년 한 번 왔다가 안 왔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효도는 옛말이 됐다. 바쁜 세상, 각자의 삶이 우선이다. 자녀들은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고, 때론 안부 전화조차 잊는다.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 그들도 살아내야 하니까.
나는 요즘 오래 사는 것이 두렵다. 백 세 인생이라지만, 그 마지막 20년이 ‘존엄’을 잃은 채 살아가는 시간이라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돈이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몸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건 감옥이다. 살아 있음이 아니라 붙들린 존재로 남는 것이다.
나는 아직 내 발로 걷고, 내 손으로 밥을 먹는다. 화장실도 스스로 간다. 이 당연한 일상이 하루하루 감사하다. 그러나 이 고마움은 오래 가지 않으리란 것도 안다. 지금의 이 건강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무너져 가리란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마지막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리며 “괜찮아요, 어르신”이라며 위로할까? 아니면 조용히 잊힌 이름으로 침대 하나에 눕게 될까?
그래서 준비해야 한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살다 가는 삶.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는 삶. 나답게 살아왔듯, 나답게 떠나는 일.
나는 요즘 주변에 말한다.
“내가 요양원 가게 되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웃으면서 보내줘. 내 삶은 내가 정리할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이들은 웃지만, 나는 진심이다. 백 세 인생, 길수록 의미가 옅어진다면 차라리 짧고 선명한 삶이 낫다.
노인은 이곳저곳이 아프다. 그리고 그 아픔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진짜 아픔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다. 쓸모없다는 자괴감, 외롭다는 허무함, 잊혔다는 서글픔.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노인의 용기다.
오늘도 약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한다. 이제는 ‘어떻게 살까’보다 ‘어떻게 떠날까’를 준비할 시간이다. 남은 삶이 길어질수록, 고독은 깊어지고, 의미는 흐려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욕심을 버리고자 한다. 오래 살기보다, 품위 있게 살기를.
‘백 세 인생’이 모두에게 축복이 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가장 조용한 재앙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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