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김창현
눈이 내리면 도시는 궁전이 된다.소녀는 더욱 우아해지고,가로등은 더욱 운치있다.종소리는 더욱 맑고,성당의 불빛은 더욱 성스럽다.나무는 雪花가 되고,차는 은마차가 된다.빌딍은 하얀 외투 걸치고 어딘가로 나서고,네온은 이국처럼 신비롭다.아이들은 눈사람을 뭉치고,연인은 서로에게 전화를 건다.눈은 커피를 더욱 향기롭게 하고,약속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사람들 얼굴에 엷은 미소 띄게하고,타인에게 부드러운 시선 보내게 한다.눈은 가난한 家長이 호주머니를 뒤져 군밤을 사게 하고,자선남비에 지폐를 던지게 한다.
눈이 내리면 시골은 설국이 된다.호수는 더욱 깔끔하고,산은 더욱 신비롭다.떠나는 기차는 더욱 아름답고,기적소리는 더욱 맑다.산촌의 아침은 더욱 고요하고,광야의 등불은 더욱 아련하다.산사의 풍경소리는 더욱 은은하고,눈 쌓인 탑은 더욱 운치있다.솔은 더욱 청량하고,대는 더욱 싱싱하다.폭포는 더욱 푸르고,암봉은 더욱 기괴하다.눈은 한낮을 더욱 고요하게 하고 한밤을 더욱 적막하게 한다.눈은 바다를 더욱 외롭게 하고,섬을 더욱 그립게 한다.
눈이 내리면 편지를 쓰고싶다.먼 남쪽 목로주점에 홀로 가고 싶다.애수 어린 영화를 보러가거나,서재에서 묵향을 즐기고 싶다.교회의 캐롤이 그립고,법당의 목탁소리가 그립다.호숫가 찻집에서 음악을 듣고싶고,古家에서 거문고 소릴 듣고싶다.눈이 내리면 雪中梅처럼 향기롭고 싶다.눈 내리는 산이 되고 싶고,호수가 되고 싶다.눈 내리는 산촌 오솔길이 되고 싶고,강촌 섶다리가 되고싶다.눈 내리는 나목이 되고 싶고,나목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되고싶다.아!눈이 내리는 밤은 기적소리 되어 먼 광야를 헤매고 싶고,종소리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
눈 온 아침
새벽 6시에 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눈은 사철나무 울타리 푸른 잎에,텅 빈 어린이 놀이터 빈 그네 위에 내리고 있다.
혼자 눈내리는 뜰 한참 보다가 문득 거실 베란다 매화 한송이가 핀 것을 발견했다.년초에 직장 후배한테 받은 매화다.하얀 향기가 주변 공간에 가날프게 퍼지고 있다.한송이만 홀로 피었고,가지엔 또다른 여나믄개 꽃몽오리가 맺혀있다.그가 나에게 붉은 紅梅가 아닌 푸른 靑梅를 준 뜻 알만하다.
푸른 빛 도는 白梅를 靑梅라 부른다.청매 그 맑고 푸른 빛 보라는 것이다.정도전은 매화를 이리 읊었다.<옥을 쪼아 만든 듯 깨끗한 모습과 얼음처럼 찬 기운이 눈 속에서 핌은,선비가 누속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자세로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나는 그에게 내 수필집과 통도사서 사온 무명베 한조각을 주었다.베에 반야심경이 찍혀있으니,그가 비자나무 차탁에 오지 찻잔 올려놓기 좋을 것이다.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마음으로 차 마시라는 뜻이다.
하필이면 눈 오는 아침에 청매가 꽃 피울게 뭐람.코를 대니 매화 향기 맑고 달콤하다.그 가날픈 향기는 오래 이어온 그와의 인연같다.보통 인연이면 은퇴 후 10년이면 끝나는데 그는 다르다.
눈 오는 아침을 그냥 보낼소냐.맹호연은 나귀를 타고 破橋를 건너 설산에 들어가 매화를 찾았다고 한다.친구와 법륜사 옆으로 광교산엘 올랐다.여름에 푸르던 계곡물 꽁꽁 얼어붙었고,옷 벗은 신갈나무 숲에 싸락눈이 내린다.눈 내린 산길은 고요한데 아무도 밟지않은 눈길 숲속으로 뻗어있다.581미터 시루봉 정상은 은빛 세계다.빤짝빤짝 눈가루는 천지에 흩날리고,눈으로 은회색이 된 솔잎 하늘을 덮었고,기암괴석에 쌓인 눈은 참 소담스럽다.암봉 하나 하나가 태산처럼 신비롭다.그 중 은가루 덮어쓴 키 작은 철쭉이 가장 아름답다.은반 위 하얀 바레리나처럼 바람에 춤추고 있다.환상의 백설 궁전에 초대된 느낌이다.올 겨울 가장 아름다운 풍경에서 놀다가 조심스레 지팡이 짚고 천천히 광교산 내려왔다.
빈 호주머니 탓 할 것 없다.검소함을 준다.고물 손전화 탓 할 것 없다.속세와 단절시켜 준다.한파 탓 할 것 없다.백설향으로 초대한다.매화 향기 맛본 후 설향을 거닐었으면 그로 족하지 않은가.